잠깐, 가닥 좀 추려봅시다

이 영 석 국립 한국농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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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5년마다 치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난 정권에 대한 평가와 대권에 도전하는 이들의 공방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언론보도는 대선 외에도 한·미, 한·EU, 한·아세안 등과의 FTA를 둘러 싼 논쟁과 새로운 수도권 신도시 지정을 비롯한 부동산 문제, 이제는 상시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남북문제, 그리고 여기에 끼어든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과 그와 관련된 경찰권 문제, 산업기능요원제도를 악용한 병역비리 문제 등이 뒤섞이면서 매우 혼란스럽고 산만하다. 국민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로 보고 판단하려 하기보다는 아예 상관하지 말자는 쪽으로 자꾸만 기우는 것 같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여기서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닥을 잡아보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어떤 노력과 과정을 통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이며,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찾고, 바로 그 과제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한 올바른 문제인식과 해결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앞으로의 국정운영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대선은 지난 정권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정권을 계속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차원의 단순한 과제가 아니다.

국가마다 각각의 성장과정에 따라서 추구하는 바가 달라져야 한다. 사람도 갓난아이 때는 보살펴주는 엄마가 더 절실하지만, 청소년기에 이르면 차츰 단련과 훈련이 필요해지면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도 달라지듯이, 나라의 성장과 발전도 마찬가지다. 독립전쟁을 할 때는 독립군을 거느린 군인들이, 전후복구가 절실할 때는 산업과 경제전문가들이 중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과 6·25를 거치면서 정부를 구성하고, 가난과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보다는 개발독재를 택하는 등의 숱한 어려움과 부작용 속에서도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그리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역량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이고 OECD에도 가입했고, UN 사무총장도 배출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대한민국의 갓난아이에 비유한다면, 6·25는 홍역을 앓았던 것에 비유할 수 있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베트남 파병, 간호원과 광부의 서독 파견, 가발과 떡갈잎 수출과 같이, 굶지 않고 살아남기 위하여 정말 가리지 않고 뛰어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도 이루어 냈다. 그리고 차츰 웬만한 저항력도 갖추고, 또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도 어느 정도는 갖춘 청소년기를 지나서, 이제는 무조건 앞만 보고 뛰지 않고, 가끔은 뒤도 돌아보고, 또 아래도 보면서, 속도조절을 해가며 달릴 수 있는 제법 원숙한 청년기에 이르렀고, 이제는 장년, 보다 여유로운 선진국을 향해서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에 이르려면 기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목표’ 만큼이나 ‘목표에 이르는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80여 년 동안 참으로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어 오면서, ‘생존’과 ‘승리’가 최고의 가치일 뿐, 생존과 승리에 이르는 과정과 수단의 정당성과 질서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아왔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지금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곤 한다.

우리는 이제 어려웠던 소년시절에 체화된 잘못된 사고와 습관, 성과 제일주의를 고쳐야 한다. 아마 다음 정권에는 우리가 선진국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선진국은 경제성장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 정의와 질서가 바로 서지 않으면 경제성장이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가져올 뿐이다. 돈벌이는 성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한국에서 하고, 돈 쓰는 것은 쓸 곳이 마땅치 않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쓰게 하거나, 최선을 다해도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지 않도록 경제정의와 경제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는 고도성장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영 석 국립 한국농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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