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착각’

그가 또 말이 많아졌다. 김근태의 말을 빌리면 “지지율 좀 올랐다고…” 그런지 모르겠다. 그의 요즘 말은 대통령이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을 보는 것 같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열린우리당 당수처럼 보인다. ‘복당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의 심지는 이미 복당한 것 같다. “구태정치를 한다”고 공격받은 정동영이나 김근태는 열린우리당 의장 출신이다. 당의장에 통일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했고, 대통령이 된 뒤엔 은총을 받았다. 서로 도왔던 사이가 임기말 들어서는 원수지간이 됐다. “잔꾀 정치를 한다”는 것은 노무현에 대한 정·김의 포문이다.

그의 무차별 독설은 그야말로 무차별이다. 손학규는 “보따리 장수”, 정운찬은 “기회주의자”라고 해댔다. 이명박, 박근혜에게도 뭐라고 또 할 것이다. 대선 주자마다 돌아가며 힐난하는 이유가 있다. 점지해둔 후계자를 위해서다. 열린우리당 해체나 탈당은 창당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다.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 정치”가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이라지만,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 정치를 부정하는 정당은 없다. 열린우리당의 태생이 민주당의 분당이고 보면, 그리고 그가 주도한 것이고 보면, 그도 그가 말하는 ‘보따리 장수’고 ‘기회주의자’인 것이다.

그에게 이즈음의 우군은 오로지 친노계열인 친위부대 뿐이다. 이해찬·한명숙·김혁규 트리오를 비롯한 ‘참정연’ ‘의정연’ 계파와 ‘노사모’ 출신 등이 골수를 형성한다. 이들 직계를 토대로 자신의 의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청와대를 물려줄 요량인 속셈을 간파치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속셈엔 나름대로 자신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다. 대통령 노무현이 아무리 지지도가 낮고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을 지라도, 절대적 지지 세력의 부동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같은 지지 세력을 15%로 보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알파를 생성하면 승산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대선 양상이 다자 구도로 전망되는 것은 그들에겐 고무적이다. 절대적 부동층(不動層)이 아닌 상대적 부동층(浮動層)의 분열은 자신들의 승리를 담보하는 요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착각하고 있다. 박정희는 심복 중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당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운명을 같이한 신군부의 혈맹이다. 전두환은 청와대를 노태우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청와대에 들어가자 마자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냈다.

노태우는 3당을 합당한 같은 민자당의 김영삼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게 무난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노태우와 전두환은 김영삼 치하에서 법정에 서야 했다. 김영삼은 그래도 민주화 동지인 김대중에게 자릴 물려주고 싶어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은 여전히 앙숙이다. 김대중은 대북정책의 계승자로 노무현을 청와대 주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기대만큼 썩 기분 좋은 대접을 받고있는 입장은 아니다.

이제 노무현이 자기 사람으로 다음 대통령을 만든다고 해서 대접받을 것으로 여기면 이 역시 오산이다. 그가 퇴임 후에도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덴 더 그렇다. 전임 대통령이 ‘상왕’ 노릇하는 것을 좋아할 현직 대통령은 그가 누구이든 있을 리 없다.

그의 자기 사람 대통령 만들기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청와대 주인이 되고나면 자기 사람이 아닌 게 세상사 이치다. 정치판은 더욱 그러하다. 직함없는 ‘당수’ 노릇 해가며, 적전 상륙에 앞서 일전불사의 친노계 전열 정비에 몰두해도 나중에 보면 다 허망지사다. 되레 품격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딴 생각에 열중 하다가 언행에 주관적 구체성이 불거지면 말썽을 살 공산이 많다.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의 현저한 ‘선거법’ 위반 시비가 벌어지는 불행한 사태는 없어야 한다.

그의 지지도가 한동안 오름세를 보인 덴, 그 자신의 말이 없었던 사실을 그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같은 지지도 상승은 보기가 좋았다. 대통령이 욕 얻어 먹는 것을 보는 것도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걱정이다.

바뀌는 무대는 자신의 무대가 아니다. 정치판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더 한다. 이것이 역사의 보편적 가치성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 파리에 재입성했으나 이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다시 유배됐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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