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의 오만?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 회의 장소가 도청이 아닌 곳으로 바뀌었다. 내일 열릴 예정인 도시계획위원회는 화장시설 안건을 다룬다. 주차난 때문에 옮겼다고도 하고, 주민들 반대 시위가 있을 것에 대비해 옮겼다고도 한다. 하남·용인·광명·부천 등지의 장묘시설 추진이 곳곳마다 갈등을 겪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초상을 당하면 빚 내서라도 제대로 장례를 치렀던 시절의 상여 행렬은 자전거를 타고가던 일제 순사도 피해 갔다. ‘우는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고 했을만큼 무서운 일제 순사도 그랬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앞이 북망일세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하는 메긴 소리에 상두꾼들의 “너허 너허 너화 너 / 너이가지 넘자 너화 너”하는 받는 소리가 이어지곤 했다. 허례허식이라 하여 없어진지가 오래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장례에 빚을 내는 것도, 일제 순사가 자전거를 비켜 서는 것도 알고 보면 죽은 이에 대한 산자의 예의범절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상여를 내라고 해도 못한다. 상두꾼 노릇 해줄 이웃도 없고, 차량 홍수로 길도 막힌다.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로 뚝딱 떠나는 죽은 이의 저승길에 산자들 말도 많고 탈도 참 많다. 대저 삶과 죽음의 경계는 뭣일까, 잠 드는 줄 모르고 잠든 순간과 같은 것일까, 분명한 것은 잠은 휴식이지만 죽음은 소멸이란 사실이다. 혼령이 떠나 털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은 그가 누구든 한 인생의 엄숙한 종말이다. 사(死)는 우연이 아닌 생(生)의 필연이다. 죽음엔 노소가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죽음 앞엔 이래서 그 누구도 오만할 수가 없다.

죽은 육신의 매장은 물리적 변화를 가져오고, 화장은 화학적 변화를 가져온다. 국토의 산야가 묘지화한다는 우려가 높다. 이렇기도 하지만 한 지관(地官)의 말이 생각난다. 명당, 명당하지만 명당은 99.9%가 없다는 것이다. 또 명당일지라도 잘못쓰면 효험이 없다고 한다. 지세에 따른 하관 시각, 깊이 그리고 방위 등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매장보단 화장을 권장한다. 매장은 잘못하면 화가 미치지만, 화장은 무해무득 하므로 무난하다는 것이다. 그 지관은 누구라고 하면 대체로 알만한 고명한 이다.

백년도 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많다. 화장시설의 가수요층이 인간인 것이다. 그렇긴 해도 화장시설을 좋아할 산 사람은 없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내집 근처가 아니고 네집 근처니까 그런 시설을 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정서상 안 좋다고 한다. 해법이 참 어려운 난제다. 갈등은 더 깊어지고 죽은 이의 저승길은 점점 난감해진다.

인식의 문제다. 파리에는 공동묘역이 시내에 있고, 일본은 도심지에 화장시설이 있는 곳이 적잖다. 여긴 프랑스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기 때문에 그같은 인식을 강요할 수는 물론 없다. 이런 건 생각해볼 수가 있다. 곳곳마다 갈등을 겪는 시설이 다 그토록 유해환경이냐는 것이다. 감성에 의한 개연성보다는 이성에 의한 구체성이 제시돼야 설득력을 지닌다. 자치단체가 만약 들어서선 안 될 지역에 흉하게 세운다면 백번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 아예 없는것이 있는 것 보다 낫다는 관념적 시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대적 장례시설은 공원화가 추세다. 그래도 장례시설이긴 하지만, 거부감을 덜 갖게 하는 건 사실이다. 공원화는 인간친화의 노력이다. 산자가 유명을 달리하여 죽은 이에 갖는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코자 하는 원초적 욕구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다. 죽은 이 앞에서 결코 오만할 수 없는 산자의 경건함을 일깨우는 것이 장례시설의 공원화인 것이다. 엄격히 따지면 그같은 시설 추진이 문제이기 보다는 어떻게 시설하느냐가 문제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즐거움으로만 인생을 추구하려고 들지만, 슬픔은 더 큰 인생의 중요 부분이다. 죽음은 가족중에도 있고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죽음은 가장 불행한 슬픔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인생의 중요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승의 종착이 곧 화장시설이다. 이를 욕되게 할 수 없는 연유가 뭣인가를 한 번 되새겨 볼만도 하다. 못살던 시절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가치를 존중했다. 하물며 그 시절보다 잘사는 이 시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도시계획위원회 회의 장소를 비록 바꾸긴했어도 인간의 인성은 모든 사람마다 살아 있다. 마지막 이승의 길목이 편하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오기는 삶의 일을 저해하고 아량은 삶의 일을 도모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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