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2005년 한해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머무르는 동안 경험했던 일이다. 필자는 전자기기 전문매장에서 복사, 스캐닝, 팩스의 기능을 두루 갖춘 컬러프린터 한 대를 200달러에 구입한 적이 있다. 생각보다는 값도 싸고 잉크젯프린터이지만 성능도 레이저프린터에 버금갈 정도로 매우 좋았다. 컬러프린터에 사용하는 잉크가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교환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문제를 제외하면 매우 만족스러운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기업들이 컬러프린터 복합기를 이처럼 헐값에 내다 팔수밖에 없는 이유는 컬러프린터시장에 참여하는 기업이 매우 많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시장에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제품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살을 깎는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필자는 컬러프린터 복합기 생산업체들이 자사 제품들을 이처럼 헐값에 팔면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프린터를 생산하는 기업들의 기막힌 상술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컬러프린터의 가격은 기대 이상으로 대단히 저렴할지라도 비싼 가격에 판매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잉크는 개당 50달러로 매우 비싼 가격에 팔았기 때문이다. 잉크의 수명도 대단히 짧아 불과 몇 백 장만 인쇄하면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몇 달만 사용하면 잉크 값이 프린터 값보다 훨씬 비싸,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실정이었다. 필자가 구입한 제품만 그러한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기업들이 생산하는 컬러프린터와 잉크를 비교해 보았더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컬러프린터 복합기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헐값에 판매하는 대신 자사 프린터에 사용하는 잉크를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컬러프린터 복합기의 헐값 판매로부터 입은 손실을 보전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들은 이윤극대화를 위해 시장원리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컬러프린터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잉크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고 소비자는 그러한 가격전략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컬러프린터에 사용할 수 있는 잉크를 오직 자사 제품 것만 가능하도록 한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프린터를 구매한 고객은 미우나 고우나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잉크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프린터시장에는 유사한 대체재가 많으나 프린터에 사용하는 잉크는 기업들의 보이지 않는 담합으로 제품을 차별화함으로써 잉크시장에 유사한 대체재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컬러프린터의 가격 변화에는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잉크의 가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잉크를 비싼 값에 구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컬러프린터시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기와 게임 팩, 컴퓨터와 컴퓨터 프로그램,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등과 같은 많은 유사한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컬러프린터와 잉크시장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 휴렛팩커드, 삼성전자, 한국엡손, 롯데캐논 등 4개사가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프린터 소모품시장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였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타사 제품의 호환이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리필용 잉크조차 구하기 어려워 소비자들은 카트리지를 통째로 바꿔야 하는 손해를 감내해야만 한다. 웬만한 제품의 경우 카트리지 가격이 7만~8만원을 호가하니 소비자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찍이 간파한 유럽 의회는 2006년부터 부품 교환이 안 되거나 부품의 재활용이 불가능한 프린터를 시장에서 완전 퇴출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이에 버금가는 소비자주권을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일까. 또 다시 프린터 잉크를 교체해야할 때가 다가오면서 문득 볼모로 잡힌 기분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임 덕 호 한양대 경상대학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