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관계의 변화

평양정권이 살판났다. 외무성 부상 김계관은 뉴욕에서 미 국무부의 칙사 대접을 받았다. 떡대같은 장정의 두 경호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정중히 대했다. 북·미관계 회복을 위한 미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과 이틀간의 비밀회담이 있었다. 귀국하는 김계관은 만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현안의 동결자금이 풀렸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였던 자금이 해제된 것이다. 그러나 북측은 지난 20일 예정된 이틀째 6자회담을 공전시켰다. BDA에 갇힌 2천500만 달러가 먼저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화를 위한 북·미 수교관계 수립의 논의가 있었다. 연락사무소 설치를 거치느냐, 바로 공관을 두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부시가 평양정권을 ‘악의 축’으로 매도한지가 언젠데, 놀라운 변화다. 북·미관계의 전환은 2·13 베이징 합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물밑 접촉은 그 이전에 있었다. 지난 1월 미국은 북측과 베를린에서 집중적 회담을 가졌다. 양자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종전의 강경책에서 부시 스스로 한발 물러선 것이다.

핵 무기가 과연 무섭긴 하다. 2006년 10월9일 핵 폭탄 실험을 성공한 이후, 결국 이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만이 아니다. 나라안 한나라당도 대북정책의 강경 기조를 수정할 것 같다. 대북 사절을 보내겠다고 한다.

평양정권의 요구는 그러나 이제부터다.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교역법 조속 해제 등은 북·미 뉴욕회담의 합의 사항이다.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 등 지원은 2·13 합의다. 경수로 완공을 요구할 공산도 높다. 뭣보다 미국이 공화국을 적대시하는 법률적 제도적 장치가 제거돼야 한다고 말한다. 핵 불능화 시한을 최대한 늘리면서 다양한 대미 협상카드를 구사할 작심인 것이다. 대남 정책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그런데도 평양정권에 마냥 끌려만 간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도 같은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의 영도로 미 제국주의자들이 공화국에 무릎을 꿇고 들어왔다’며 쾌재를 부를 것 같다.

부시의 변화는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다. 대북 압박의 강경책이 먹혀들질 않았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할 수록 커지는 것은 중국의 동북아권 영향력이다. 부시는 이게 싫은 것이다.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외교적 실리의 포석으로 나온 것이 대북정책의 변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무작정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 핵 불능화 조치의 시한으로 보는 앞으로의 약 1년이 고비로 보인다.

바둑에서 별 부담을 갖지않는 일방적인 패가 꽃놀이패다. 작금의 북·미관계는 미국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북이 즐기는 꽃놀이 패가 마냥 지속되긴 어렵다.

‘세계식량계획’(WFP)은 며칠전 북녘의 식량난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식량난은 여전하고, 인민의 이탈, 즉 탈북자는 사태가 나도 국제사회를 당당하게 주무른다. 여기 같으면 폭동이나 민란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터인데, 끄덕없는 것을 보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장기 집권도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12년 집권의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야 했고, 18년의 박정희는 비명에 가고, 8년의 전두환은 백담사엘 가야 했다. 하물며 대를 이은 59년의 집권에도 요지부동인 것은 정치학의 연구 과제가 될만하다. 그러나 실체(實體)야 어떻든 실재(實在)한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과거도 마찬가지다. 제네바 합의, 더 나아가 6·25 남침전쟁을 지금 말하는 것은 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이게 현실이다. 부시는 핵 문젤 실재한 정권의 실체로 보고 좋든 굳든 북측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2·13 합의는 남쪽 부담이 크다. 크지만 북이 이 합의로 주변국의 도움을 극대화하는 것은 좋다. 바라는 것은 정녕 핵으로 남쪽을 위협할 요량이 아니면 핵 장사는 이번 6자회담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설령 평양을 공격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남쪽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이 낡았긴 해도 그만한 안전 장치는 살아 있다.

북·미관계의 밀월이 핵의 시류에 떠밀려서 갖는 억지 춘향이긴 해도 막말을 주고 받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남북이 공존공영의 길목에 서 있다. 북·미의 해빙 무드가 만약 실패로 돌아가 다시 얼어붙으면 한반도든, 조선반도든 이 땅은 주변의 열강들 각축 속에 평화가 멀어진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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