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김씨, 어머니는 이씨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를 어머니(아내) 성씨 따라 이씨로 한 아들이 최씨를 아내로 맞아 낳은 남자 아이를 역시 어머니(아내) 성씨 따라 최씨로 했다. 이 남자 아이가 커서 정씨 아내 사이에 낳은 아이 성씨를 또 어머니(아내) 따라 정씨로 했다. 성씨가 자자손손마다 달라졌다. 자자손손이 아니라 같은 친부모의 형제자매끼리도 선택에 따라 성이 부모 성으로 갈라질 수가 있다.
2005년 3월 개정된 민법 781조(자의 입적, 성과 본) 조항이다.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헌법재판소가 2005년 2월 현행 민법 조항 1항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한다’는 규정이 양성 평등에 합당치 않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단서 조문을 넣어 개정한 것이다. 내년에 시행될 개정 조문은 현행 781조 1항 뒤에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남편) 성씨 계승을 원칙으로 하면서 어머니(아내) 성씨도 따를 수 있도록 선택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런 규정이 사회에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내년부터 두고 볼 일이다.
물론 첫머리에 든 자자손손의 경우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덜 극단적이어도 성씨의 근본을 헤아릴 수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도 또 남녀 평등에 위배된다며 아예 민법 781조 1항을 삭제하는 민법 개정이 법제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즉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원칙 외에 협의에 의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예외 규정의 조항 등을 모두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자녀의 성씨 문제에 법률적 규제를 가할 것 없이 부모가 마음대로 하고, 또 아이가 커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러잖아도 아버지 성씨 계승의 강제규정이 협의규정이 되어 혼선이 우려되는 마당에, 성씨의 법률적 규제 철폐의 임의화는 아예 성씨가 지닌 존립의 의의마저 사라진다. 물론 모·조모·증조모·고조모 더 위로 올라가는 모계로 보면 모든 성씨가 섞여 지금의 성씨는 부계의 반쪽 혈통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인류가 지닌 성씨가 인간다운 인간의 존엄성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반쪽 혈통으로나마 핏줄을 가리는 것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됨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자의 성과 본’ 조항 삭제의 민법 개정은 일가친척끼리도 성씨가 달라 예컨대 족보도 만들 수 없게 된다. 일상생활은 물론, 법률 관계에도 큰 혼란을 빚어 이만저만이 아닌 사회적 손실을 유발한다.
법제처가 추진하는 이같은 민법 개정은 이미 개정된 민법이 내년 1월1일 시행되기 앞서 재개정하자는 것이다. 시행도 안 된 법을 재개정하는 것은 여성가족부로부터 넘겨받은 남녀 차별 개선의 요구이고, 여성가족부는 무슨 여성개발원의 연구 용역을 통한 보고서에서 작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정부의 부처다. 공연한 일 벌이길 좋아하는 호사가라 해도 그렇지, 참 하릴 없는 여성단체고 정부 부처인 것 같다. 서구나 일본 같은 선진국의 여성문화에서도 자녀가 남편 성씨 따라가는 것을 두고 평등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소린 일찍이 듣도 보도 못했다. 자녀 성씨를 어머니(아내) 성씨로 하는 것은 고사하고, 결혼하면 아내는 남편 성씨를 따라가는 것이 선진국 사회다.
세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빼앗지 않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 뿐이지만, 미국이나 일본 여성계가 남편 성씨로 바꾸는 것을 두고 불평 불만이 있었다는 말 또한 듣도 보도 못했다.
남녀 평등은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보는 협량한 눈보단, 인간의 눈으로 보는 열린 안목으로 판단돼야 한다. 여성이라고 여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도 있고 딸이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과 딸을 두고 여자와 남자만의 입장에서 인권을 차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남녀의 대립 관계가 아닌 살기좋은 인간사회가 추구돼야 한다. 실질적인 인간사 문제를 찾아 접근해야 하는 것으로 아직도 이런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혼 후 300일 이내에 태어난 아이는 전부(전 남편)의 아이로 추정한다’는 민법 조항의 일괄 규정은 재혼 임신의 조기출산을 무시한 여성의 인권 침해다.
법제처의 민법 개정 추진에 주무부처인 법무부가 회의적 판단을 갖는 것은 다행이다. 마땅히 철회돼야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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