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의 ‘절규’

선거판이어서 그랬을까, 선거 때라 해도 그렇지 언론은 거의 무심했다. 그 많은 글 가운데서도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 듣기 좋은 말이면 다 쏟아내는 선거판에서조차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그들의 절박한 호소는 이렇게 고독하게 묻혔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부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생계가 위협받는 그들의 사정은 자살을 생각할만큼 절박했다.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시각장애인 4명 한강 투신’ ‘시각장애 안마사 4명 한강 투신… 곧바로 구조돼’ 1~2단으로 보도됐다. 그나마 나지않은 중앙지도 있다.

일본은 안마사 자격을 일반인에게도 준다. 우리처럼 시각장애인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대신, 시각장애인에 대한 다른 복지가 그만큼 발달하였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 공무원도 있다. 우린 사회복지 제도가 아직 못미쳐 시각장애인 복지 역시 아주 열악하다.

안마사 관련 법률이 시각장애인에 한해 자격을 주도록 한 것은 일종의 묵계에 의한 사회적 합의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체장애가 어디이든 장애가 일상생활에 끼치는 불편이 막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겪는 빛 잃은 시각장애의 고통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브라운관에서 활약했던 연기파 배우 홍성민씨가 실명 이후에 연극 무대에 선 감동적 소감을 밝히면서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어둠의 고통을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사회적 합의의 해석을 깬 위헌 판결은 기계적 판결이다. 위헌의 이유로 든 직업선택의 침해나 평등권 위배는 개념의 전제가 잘못됐다. 안마사 직업이 사회 구성원으로 필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기능을 익히는데 까다로운 요건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고소득 수준이어서 일반인들이 다퉈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안마사 자격을 제한받았다 해서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받았다거나 평등권을 위배당했다고 보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사회 인식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실체적 사실로는 없는 법익의 침해가 있는 것 처럼 의제화 한 허구적 이론의 오류를 범하였다.

설령, 위헌의 요소가 있다고 판단됐을 지라도 헌재 재판관들은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했다. 위헌보단 최소한 헌법 불합치로 경과조치를 두는 주의 의무가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헌으로 시각장애인들 생계를 단칼에 끊어놨다. 법리로나 사리로나 정황으로나 다 이토록 의심이 가는 판결이지만 단심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이의를 호소할 곳도 없다. 시각장애인들의 저항적 절규는 이래서 보기에 더 답답하다.

이의 주무부처는 보건복지부다. 누구보다 분배를 우선시하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헌법재판소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 요량은 짐작이 가지만, 시각장애인들의 몸부림을 외면한 채 입을 봉하고만 있는 것은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

미국의 여류 문필가며 사회사업가 켈러(1880~1969)는 두 살 때 앓은 성홍열로 빛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삼중고를 극복, 맹농아자 교육·복지사업에 초인적 기여를 했다. ‘나의 생애’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언젠간 이런 분이 나오겠지만 당장은 생계문제가 급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묵시에 의한 과거의 사회적 합의를 그대로 이어가자는 것이다. 관련 법규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바뀌겠지만 운용의 묘로 안마사 직업을 시각장애인 몫으로 지속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리 역시 안마사 직업을 굳이 시각장애인 몫으로 안 남겨놔도 될만큼 시각장애인 복지가 발달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계제가 아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더 이상 항의 시위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사회의 책임이다. 정부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하고 정치권 역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소수의 민생도 민생이다. 이미 끝난 선거타령으로 민생을 계속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임양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