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공해와 寓話

다 아는 ‘어느 부자(父子)와 당나귀’ 이야기다. 당나귀를 끌고 걸어가는 부자를 보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타고가지 그냥 간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아버지를 걷게 한다”면서 아들을 불효자라고 나무랐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리게하고 자신이 당나귀를 탔으나 이번엔 “어린 아들을 걸린다”며 아버지를 탓했다. 궁리끝에 부자가 같이 당나귀를 탔다. 그래도 사람들의 욕을 들었다. “모진 부자가 짐승을 혹사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말이란 이처럼 묘하다. 이집트의 우화로 ‘악어의 논법’이란 게 있다. 나일강의 악어에게 어린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가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악어는 그럼 내가 아이를 돌려줄 것인지, 안 돌려줄 것인지 내 마음을 맞추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아이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틀렸다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우꼬리’이야기는 이솝의 우화다. 한 여우가 함정에 빠져 발버둥치다가 그만 꼬리를 잘린 채 겨우 살아나왔다. 꼬리를 잃어 창피해진 그 여우는 동료들에게 “너희들도 꼬리가 없으면 늑대에게 쫓길때나 앉을 때나 방해가 안 되니까 잘라버리라”고 충동질했다.

우린 지금 이런 우화같은 논법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산다. 현대 사회구조는 복잡하다. 의사 형성도 가지가지다. 의사전달 수단도 다양하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다 자기 입장에서만 한다. 남의 입장은 생각하질 않는다. 주관적 설득만 있을 뿐 객관적 이해는 외면한다.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쩜 본능이긴 하지만 본능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사회다. 그래서 법률이나 윤리 도덕 등의 규범이 있으나 이보다 앞서는 것이 일의 전후 사정을 참작하는 경우(境遇)다.

인간생활의 경우는 주관적 요소가 아닌 객관적 판단이다. 여기에는 원칙논리가 지배된다. 그런데 이마저 자기 좋을 대로 끌어다 붙인다. 이게 그때 그때 따라서 말이 달라지는 상황논리다. 상황논리가 원칙논리로 행세한다. 우린 지금 이런 말의 혼돈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심지어는 문화도 그렇다. 사회분야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렇고, 관료들도 그렇고, 지식인들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다 보니 범부(凡夫)들도 그렇다.

그러나 그 해악은 다르다. 다스리는 이의 헷갈린 말 한 마디는 다스림을 받는 이의 헷갈리는 말 천만 마디보다 해악이 더 심하다. 범부들의 헷갈리는 말이야 실언이나 농담으로 쳐도 당사자끼리의 이해관계에 그치지만 권력자 등은 그렇지 않다. 권력의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헷갈리는 말의 위해는 막심하다.

상황논리가 원칙논리로 둔갑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지금 우린 이런 경우가 없는 사회속에서 산다. 하긴, 경우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있는 허물을 자신은 없다고 우기는 것은 꼬리잘린 여우꼴이다. 허물엔 용서받을 게 있고 용서받지 못할 게 있다.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허물은 너그럽게 여기고 상대의 용서받을 허물엔 인색하게 구는 것은 ‘악어의 논법’과 같다. ‘악어의 논법’은 상관궤변법이다.

‘어느 부자와 당나귀’ 이야기에서 쏟아진 사람들의 비난은 측면적 일리는 다 있으나 원론적 논거는 모두 없다. 전후 사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 논거다. 가령 당나귀의 상태가 안 좋으면 부자가 걸어야하는 게 맞고, 당나귀가 건강하면 부자가 함께 타는 게 정답이다. 당나귀 사정을 봐주어 한 사람만 타기로 하면 서로 바꿔가며 타도 되고, 아버지나 아들 중 몸이 더 피로한 사람이 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측면적 일리도 없는 것은 군맹무상(群盲撫象)이다. 코끼리를 가리켜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과 같다고 해서는 완전히 빗나간 얘기가 된다. 우린 어쩜 이런 빗나간 얘기가 지배하는 속에서 사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언어공해 사태로 우리의 정신환경이 점점 더 피폐해 간다. 이 칼럼 또한 그런 언어공해를 끼치지 않는 지 항상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정권은 유한하고 나라는 무한하다. 사회는 항상 시끄러울 것 같지만 언젠간 좀 조용한 날이 온다. 사람의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또 새로운 시작이다. 그 시작은 말에 질서가 있는 시대일 것 같으면 좋겠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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