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참된 사랑과 교육적 만남의 중요성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만남으로 이뤄진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 속에서 지육(智育)·덕육(德育)·체육(體育)이 실현된다. 지적인 능력, 인성의 함양, 건강한 신체를 기르는 일 등이 곧 교육이다.

교육은 또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펼쳐지는 실천적 행위다. 사회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나간다면 교육은 그 새로움을 끌어 안아야 하고 또 다른 새로움을 창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상황에선 교육이 나갈 방향에 혼란이 올 수 있다. 지식정보화시대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로지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적인 능력만 있고 정작 중요한 인간과의 따뜻한 만남은 사라지고 있다.

학교에선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진리가 추구돼야 한다. 진리는 결국 인간을 위해 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바탕으로 할 때 참된 만남이 이뤄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연의 섭리가 떠올려진다. 그 섭리를 체득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에 과연 도의가 있는가. 어른들이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자신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란 논리로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권세와 부를 얻기 위해 갖은 아부를 일삼고 흑백논리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들이 허다한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게 진실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어느 것 하나 참된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교사들이, 또는 어른들이 아무리 교육해도 그야말로 ‘시루에 물 붓기’격이 되고 만다.

흔히 모든 책임을 학교 교육에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학교 교육으로만 이같은 모순을 극복할 순 없다. 학교 교육은 국가와 사회적 필요 등으로 만들어 낸 제도다. 어찌 보면 2차 교육일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1차 교육은 가정에서 이뤄진다. 즉 학부모가 최초 교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교육을 학교에만 전가시킨다. 그리고 최초 교사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기 보다는 아이들의 잘못된 점을 학교 교육 탓으로만 돌리려 한다. 중요한 건 이같은 학부모들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학교 교육이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교육현실에 비춰볼 때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생활이 가정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많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비판받는 이유는 책무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맡았다면 가르침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실을 준비시킨다는 점에서 교육은 단기이익을 낼 수 있는 기업 활동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다. 계획도 물론 장기적이어야 하고 일관성도 있어야 한다. 이 일은 교육당국 정책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면 교육당국은 조변석개(朝變夕改)식의 정책이나 정치적 수단으로 정책을 펼쳐선 안된다. 교육 정책 기저에는 ‘교육적’이란 순수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교육은 분명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교육당국과 학교 등과의 만남으로 이뤄진다. 그 기저에 참된 사랑과 교육적 철학이 있어야 교육의 앞날이 밝아질 수 있다. 경기교육 지표가 ‘희망교육’이듯 교육이 제 자리를 찾을 때 희망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최 의 동 前 경기도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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