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사람 이름의 표본이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홍길동’이란 이름 석자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광해군(재위기간 1608~1623)때 홍길동전을 통해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 신분 차이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허균(1569~1618)의 혁명 사상을 작품화한, 최초의 한글 소설의 주인공인 홍길동과 한자는 약간 다르지만, 이 소설이 쓰여지기 100여년 전 홍길동이란 실존인물이 연산군일기 1500년(연산군 6년) 10월과 12월 두번씩이나 등장하는데, 이중 12월29일 기록을 소개한다.
“山君六年庚申一二月己酉義禁府委官韓致亨啓强盜洪吉同頂玉帶紅稱僉知白?成群載持甲兵出入官府恣行無忌其勸農里正留鄕所品官豈不知之然不捕告不可不懲?徒邊何如傅曰知道” (연산군 6년인 1500년 12월29일 의금부 위관 한치형이 아뢰기를, “강도 洪吉同이 옥정자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갖고 관부에 드나 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는데, 그 권농이나 이정들과 유향소 품관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해 고발하지 않았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게 어떠하리까?”라고 말하니, 전교말하기를, “알았다”고 했다)
위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고찰하건대 홍길동이 대낮에 무기를 들고 관부에 드나 들며 떼강도짓을 해도 지역 유지나 관리들이 체포나 고발하지 않아 그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킨 사실에다 연산군 학정하에서 홍길동의 의적활동을 그들이 방관한 사실 등을 보면, 소설 홍길동전 주인공과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금쪽 기록으로 그를 단순한 강도로 매도하고 있다. 실례로 1801년 신유년 천주교도들을 박해한 사건을 임금은 신유사옥이라고 하지만 백성들은 신유박해라 하지 않는가. 실존인물 홍길동에 대한 백성쪽 기록이 아쉽다.
실존인물 홍길동은 1440년(세종22) 전남 장성에서 양반인 아버지와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서얼의 관리 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 반포로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주로 하삼도 지방을 무대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왕족 부녀자들과 추문은 있었지만 당시 고승이었던 학조대사에게 병법과 무술을 배워 수준 높은 무술인이었다. 그는 1500년(연산군 6년) 10월22일 이순(耳順)의 나이에 체포됐다.
체포될 당시 일기는 “영의정 한치형·좌의정 성준·우의정 이극균이 함께 당시 왕에게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는 일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라고 말하니, 왕이 그대로 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당시 실존 인물 홍길동(洪吉同)이 2차례나 대신들과 왕의 입에 회자되면서 연산군일기에 살았던 자취를 남긴 것을 보면 강도는 아니었고 100년 후 태어난 허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실존 인물 홍길동이 태어난 장성 선계폭포가 있는 우반계곡은 허균이 은거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100년 전 이 고장에서 태어난 홍길동이 자신의 처지와 같음을 간파하고 그의 행적을 인용·과장해 홍길동전을 썼음이 틀림없다. 실존인물 ‘洪吉同’의 ‘同’자를 ‘童’자로 살짝 바꿔 허구인물 ‘洪吉童’을 지어냈다.
아무튼 강도 홍길동은 100년 후 모순된 사회를 개혁해보려는 양반 서얼 출신 혁명가 허균 눈에 띄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 우뚝서게 됐고 근래에는 그가 살았던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90에 64평 규모 생가까지 복원됐다.
/육 광 남 의정부 호원고교 교장·수필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