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급식이 기다려지곤 한다. 나이 어린 영양사님의 시간 편성과 조리사님들의 음식 솜씨가 아주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서 학교 급식이 아주 먹을만하다. 어떤날에는 기사님이 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반찬(주로 튀김류나 돈까스류)을 아이들이 미리 가져갈까봐 휴식시간에 지켜 서 있기도 한다.
내가 학교급식을 기다리는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맛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남은 밥과 반찬을 동네 개들에게 좀 나누어줄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거리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버려진 강아지들을 자주 본다. 버려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짧은 목줄에,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당하는 개들도 많다. 강아지를 좋아하고 가족처럼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은 그래서 늘 마음이 아프다. 그저 단 한끼나마 내가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나의 가방 안은 개들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빵부스러기나 고기덩어리가 들어 있다. 남들이 보면 흉잡힐 일이지만.
개는 동물 최상의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원숭이가 더 높은 위치다), 선사시대부터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가까운 존재였다. 인간을 현재와 같이 도운 것은 바로 개다. 유럽의 학자들은 개가 구석기시대인 BC 일만이천년경에 가축화하여 인간의 곁에서 함께 살아온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은 애견의 죽음을 두고 쓴 산문집이다. 개에 대한 추억과 슬픔, 존재에 대한 명상으로 채워져 있는 아주 신선하고 놀라운 명저다. 살아있는 동안 그에게 큰 위안을 주었고, 죽은 후 그가 몹시 그리워한 ‘타이오’라는 개는 떠돌이 개들 중에서 데려다 기른 개다.
언젠가 일본 영화 ‘하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인 하치는 일본 아키타현의 명견인 아키타견이었는데 뒷다리가 八字모양으로 생겨서 하치라고 하였단다. 자기를 아끼던 주인이 죽자 퇴근후의 주인을 기다리다가 함께 돌아오곤 하던 열차역에 가서 주인을 기다리기를 8년 정도나 계속하다가 어느 눈보라치던 날 역에서 객사했다. 아무 연락도 죽음에 대한 암시도 주지 않고 먼저 간 주인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우리나라에도 명견에 관한 설화나 일화들이 있다. 인간을 구조하거나 안내하는 훌륭한 개들도 있다. 또 그런 명견은 아니더라도 개나 강아지들이 인간에게 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강아지의 단순함과 천진난만함, 귀여운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번거로움과 복잡함, 분노와 적개심이 눈녹듯 사라진다. 그저 하루에 밥 두 끼 챙겨주고 두어 번 산책이나 시켜주면 그렇게 좋아라 한다. 욕심낼 줄 모르고 남 미워할 줄 모른다. 난 그애들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불평하고 욕심부리곤 하는가. 불면으로 지끈거리는 머리와 충혈된 눈이 쓰린 날이면 나는 ‘아, 나도 돌고 돌아 저 강아지 같이 살았으면’하면서 내세에는 강아지로 태어났으면 하고 소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운명은 모두 같다. 그것이 내가 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다. 장 그르니에가 산문집에서 쓴 것처럼 추측컨대, 우리 모두 어떤 병이나 사고로 죽을 것이다. 우리가 개와 다른 점은, 목걸이 하나 달랑 차고 담요에 둘둘 싸이는 대신, 우리의 시신은 염습을 하고 멋진 관에 담긴다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불가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또한 내세에는 무엇이 되어 어떤 인연으로 태어날 지 모른다고 한다. 지금 내가 버린 강아지가 내세의 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오늘도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기르던 강아지를 아무 대책없이 이 춥고 배고픈 사지로 내몰고 있다.
/김 현 옥 안산교육청 중등과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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