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속성

도청(盜聽) 욕구는 정보기관의 속성이다. 옛 ‘안기부 X파일’처럼 도청을 일삼은 사례는 외국에도 많다.

1960년대 에드가 후버 국장 시절 미 연방수사국(FBI)은 무차별적으로 엿들었다. 후버 국장이 8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1972년 77세로 죽을 때 까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한 것은 주요 인사들에 대한 도·감청 자료 덕분이었다. 한국 ‘X파일’ 사건처럼 그는 협박을 일삼았고, 그 대상에는 대통령까지 포함됐다고 하니 저간의 사정이 능히 짐작된다.

도청 파문 뒤 정보기관들은 혹독한 개혁을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미 FBI는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도청을 마지막으로 불법 도청을 중단했다. 동독 국가안보국 슈타지(Stasi)의 무자비한 도청과 감시를 경험한 독일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도청을 철저히 불허하는 한편 감청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프랑스도 지난해 11월부터 엘리제궁 특별팀의 도청에 대한 대대적인 청산작업으로 관련자들을 응징하고 있다.

불법 도·감청 차단의 모범적 사례는 독일이다. 선봉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헌재는 2003년 구체적인 혐의가 없어도 예방적인 차원에서 휴대전화까지 도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 니더작센주의 경찰법에 대해 지난달 위헌판결을 내렸다. “안보 없이는 자유가 없지만 그래도 보안 관련법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당수 선진국 정보기관들이 해외 파트와 국내 정보담당 분야를 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합 관리에 따를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비대화할 경우 발생할 부작용을 염두에 둔 시스템이다. 근대적 의미의 정보기관을 처음 창설한 영국을 비롯해 독일, 이스라엘 등이 모두 국내외 분야를 분리 운영하고 있다.

과거 정권의 사설 정보기관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난 우리나라의 국가정보원도 환골탈태하여야 한다. 지금 국정원은 전직 요원들의 일탈 행위까지 겹쳐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어려울 지경이다. 특히 정치권은 도청 파문의 득실 계산을 접고 먼저 국정원이 명실상부한 국가정보기관으로 거듭나도록 역량을 모아야 한다. 국정원이 설마 대통령실은 도청하지 않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대로 해외정보처로 전환, 경제·해외정보 수집에 전념케 하는 것도 대안일 수 있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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