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韓·카메룬의 밤’

‘한·카메룬의 밤’이 얼마전에 있었다. 수원시내 인계동 한 한식음식점에서다. 그들은 촉망받는 카메룬의 신 엘리트들이다. 탄디아·조스튼·통카·셈씨는 NGO를, 어스턴·이마뉴엘·쫀씨는 최고경영자과정을, 리치씨는 국제법을 전공한다.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이들은 아주대학교대학원에서 2년 과정의 전공분야를 공부하는 유학생들이다. 이중엔 경기도 영어마을 강사로 나가는 이도 있다.

(사)한국들꽃문화원장 박시영씨는 별명이 ‘들꽃박사’다. 야생화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정상급 권위를 지녔다. ‘들꽃박사’가 일찍이 미국 유학시절에 고생을 지독하게 했을 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어느 카메룬 유학생이었다. 그 고마움을 늘 잊지 못했다. 어느날 경기TV방송에 수원청소년회관 행사의 일로 나온 카메룬 유학생 탄디아씨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으나 그것은 보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행운이었다.

‘들꽃박사’는 탄디아씨를 찾았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미국에서 카메룬 사람에게 진 신세를 당신을 통해 갚겠다고 했다. 탄디아씨는 뜻하지 않은 ‘들꽃박사’의 배려속에 교분을 가지면서 동료 유학생들을 소개하여 수시로 함께 어울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메룬 유학생 8명이 ‘들꽃박사’에게 감사의 뜻으로 제의하여 갖게된 것이 ‘한·카메룬’의 밤이다. 그날은 식당 주방을 카메룬 젊은이들에게 완전 개방했다. 미리 준비한 재료로 자기네 고유의 음식을 만드는데 족히 서너시간은 걸렸다. 신바람속에 음식을 장만하는 손 놀림이 아주 경쾌했다. “오늘은 ‘돌담골’ 주방이 카메룬 주방이 됐다”며 홍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카메룬은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 내가 아는 상식의 전부였다. 카메룬 사람들의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아이들 말 문이 트이면서부터 영어를 한다기에 자료를 뒤적여봤더니 과연 그럴법 했다.

아프리카 기니만에 연한 카메룬공화국 역시 분단을 경험한 과거가 아직도 분단을 면치못한 우리와 동병상련의 정을 갖게 했다. 1884년 독일보호령으로 있다가 제1차세계대전후 국제연맹 위임으로 동부는 프랑스령 서부는 영국령이 되었다. 1960년 서부가 독립한데 이어 동부 또한 이듬해 독립하여 연방제로 있다가 1972년 연방제를 폐지하고 연합공화국이 된 것이 오늘의 카메룬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47만6천㎢에 무진장한 광업과 농·목축업이 발달됐다. 그토록 드넓은 국토에 인구는 1천100여만 정도니 무한한 천연자원과 함께 미래가 밝은 나라다. 세계 문물 도입과 선진 지식산업 배양을 위해 우리나라에 유학온 게 이들 카메룬 젊은이들이다. 유학생들은 틈틈이 일본이나 독일에 가서 틈새공부를 하면서 전문분야의 새로운 자료를 가져오곤 하기도 한다.

이윽고 그들의 음식장만이 다 되어 ‘들꽃박사’의 초청으로 참석한 누구라하면 알만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을 같이했다. 초청된 여성 인사들은 유학생들이 준비해온 카메룬 고유 의상을 입기도 했다. 카메룬 젊은이들은 순박하면서도 당당한 게 무척 인상적이다. 식사와 환담이 무르익은데 이어 그들의 음악과 전통 춤을 선보이는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카메룬 미래의 지도자들이다. 아마 10년후면 카메룬의 각계에서 큰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오늘 한국인이 베푼 카메룬에 대한 이해와 친절을 우리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탄디아씨의 말이다.

수원시내 한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되어 장소와 시간을 갖게된 ‘한·카메룬의 밤’은 이렇게 조촐했지만 두 나라의 민간 친선 가교에 큰 역할을 했다. 카메룬 유학생들은 아프리카의 21세기 새 시대를 열어갈 성장 동력이다. 행여라도 자만심을 가져선 안 되는 우리의 형편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지 현

(사)한길봉사회 경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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