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만해를 찾아서

북한산을 넘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에 거처하던 심우장을 찾아 나선 길엔 가을 산취가 한창이었다. 해묵은 고샅길 어디에선가 오척 단신의 만해가 두루마기 자락에 바람을 가득 품은 채, 결연히 걸어나올 듯 했다.

북한산성 밑자락에 이르자, 울창한 소나무 가지로 뒤덮인 심우장의 대문이 불현듯 나타났다.

관리인마저 출타해 버린 심우장엔 깊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다섯 칸의 한옥을 둘러보고 툇마루에 나앉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만해의 체취가 깃든 유품 한점을 보존하지 못한 심우장의 정면에는 흉물처럼 관리사옥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앉혔다는 만해 선생의 유지가 해방조국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연상케 하는 붉은 벽돌집으로 여지없이 꺾여진 셈이다.

일제치하와 등진 일상을 절묘하게 북향집으로 고수했던 만해 선생은 眼界가 바로 心界임을 깨우쳐 주었거늘…. 만해의 정기를 가로막고 선 벽돌집은 노년의 만해가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꽃이나 나무를 가꾸던 뜰과 함께 70여년 된 심우장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잠식하고 있었다.

심우장과 관리사옥의 극단적인 부조화는 우리가 만해 한용운을 대해 온 이중적인 대응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인으로서, 독립지사로, 승려로서 만해를 기리면서도 아직 만해의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 만해에 대한 우리의 예찬은 어쩌면 식민지 시대의 콤플렉스를 보상할 우상 만들기로 더 조급했는지 모른다.

위난의 시기에 치열한 삶을 살았던 만해의 행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무게를 지닐 것이다. 올해로 만해입적 60년을 맞아, 만해를 회고하는 기획전과 함께, 도처에서 만해의 이름이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만해는 짙은 구름장에 가려진 달처럼 여전히 진면목을 감추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근세를 시대의 이단아로 살다 간 만해의 육성을 여과없이 들을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인간적인, 문학적인, 역사적인 만해의 세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聖과 俗의 경계지대에서 서성이다 간 만해의 자취를 찾아 온 심우장에는 침묵하는 님을 향한 만해의 시구가 노란 은행잎으로 떨어지고 있었다./김은미 유스 웨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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