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1992년 한승주 외무부 장관). “과거는 잊자”(레 둑 안 베트남 주석).
이렇게 해서 두 나라 수교가 시작된 이래 12년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 있을만큼 발전했다. 대통령은 쩐 득 르엉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주석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북베트남공산정권 수령 호치민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소련 유학을 거쳐 2차대전 땐 항일전쟁을 주도한 호치민(1890~1969)은 1975년 4월30일 하노이 정권의 사이공 함락으로 이룩한 베트남 통일을 생전에 보진 못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영원한 국부(國父)다. 그에 대한 베트남 인민의 존경심은 지도자의 이념성 보단 청렴성이 더 강하다. 독신으로 지낸 호치민의 의·식·주 생활은 평생을 인민의 대중생활과 똑같이 일관했다. 그가 썼던 검소한 나무침대 등 일상의 집기는 혁명박물관에 교범(敎範)으로 보존돼 있다.
호치민은 이미 죽었지만 사리사욕과 호사를 몰랐던 그의 지도자 정신은 인민 대중의 가슴속 깊숙이 살아 월남인민해방전선 전사(戰士·베트콩)들이 부정부패로 찌든 사이공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실로 생사를 초월한 충성의 동력이 됐던 것이다.
1964년 9월22일 청룡부대를 선발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국군은 미군에 앞서 사이공 정권 패망 이태 전인 1973년 3월24일 철수했다. 이에따른 월남 특수는 경제성장에 더 할수 없는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전쟁의 상흔은 남았다. 숱한 전사·전상자를 낸 가운데 참전 군인들 중엔 지금도 고엽제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베트남도 사정은 같다.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지역에는 한국에 대한 미움이 적지 않다. 그들의 아들이나 남편이 전선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방문으로 프레스센터 지원차 나온 하노이의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그녀는 그러나 또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젠 과거일 뿐이다”라고, 과거없는 현실은 없고 현실없는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잡히는 현실은 미래를 저해한다. 동서고금에 걸친 역사가 이러하다.
인물의 성분보다 시장(市場)의 노하우를, 아울러 과거사에 획을 긋고 미래를 향해 떨쳐 과감히 나서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현실적 용단과 웅지가 참으로 부럽다. 부럽다 못해 이의 반사경(反射鏡)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이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프랑스 식민지를 거쳐 미군과의 오랜 전쟁을 치른 베트남은 혼혈이 많다. ‘라이 따이한’들도 수천명에 이른다. 하지만 주민 대다수는 베트남족이다.
서로 총 부리를 겨눈 베트남 이민족과도 이념의 장벽을 넘어섰는 데도, 북과는 동족상잔의 참상을 치르고도 여전히 총 부리를 겨누고 있다. 같은 남쪽에서마저 이념의 대립각을 칼날처럼 세우고 있다.
국내 좌파가 정책적 진보주의자라면 정말로 좋다. 나라의 본질을 같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북적 사회주의자라면 아니다. 나라의 본질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북은 사회주의도 아닌 김일성주의다. 베트남처럼 개방·개혁을 하고 싶어도 빗장을 열면 체제가 위협받는 모순에 빠져 못하고 있다. 김일성이나 호치민은 다같은 ‘수령’이지만 두 지도자상은 완전히 다른 게 한반도의 불행이다.
북은 평화 공존을 위한 교류협력의 대상은 된다. 하지만 정치연합을 위한 정치협상의 대상은 아니다. 적어도 6·25 남침을 사죄하고 무력 도발을 포기하는 신뢰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한 그렇다.
개혁은 헌법이 정한 나라의 본질성 안에서 용인되는 것이 개혁이다. 이를 일탈하면 개혁이 아닌 쿠데타다. 만약 후자라면 개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쿠데타 시도의 종착지가 두렵다.
북의 인권 탄압엔 침묵을 지키면서 남의 온갖 일엔 인권을 찍어 댄다. 북의 체제엔 눈을 감으면서 남의 온갖 일엔 민주화를 둘러댄다. 이들 좌파가 정책적 진보주의자인 지, 친북적 김일성주의자들인 지는 국민적 의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절반만 같아도 참으로 좋겠다. 베트남 국빈 방문에서 대통령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 지 그게 궁금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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