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쌈닭과 중용론

중용(中庸)은 곧 형평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다 흡수한다. 조화인 것이다. 중도보수는 바로 중용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사회적으로는 정의구현, 문화적으로는 신문화 배양이 중도보수의 지표다.

국가사회의 정체성 구현이 이 길이고 국리민복이 또 이에 있다고 믿는다. 나라 안팎으로 도도히 흐르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정체적 보수를 거부하는 개혁적 보수를 그리고 진보주의와도 공존하는 것이 중도보수의 길이다. 남북관계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평화 공존을 위해서는 한국전쟁 도발의 불행한 과거를 접어두고 화해협력으로 가는 길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이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이 정권의 좌파 성향은 광복이후 59년사, 대한민국 56년사를 좌파시각 일색으로 덧칠하려는 현대사 쿠데타적으로 가고 있다. 국기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회적 우려가 이래서 나온다.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인 대화와 협상은 실종된 채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한다. 시장경제의 강점인 경쟁은 투자위축으로 침체된 채 계획경제적 규제로 민중은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 댄다. 사회는 국가보안사범 출신의 좌익 세력이 정의로 대표되고, 문화는 이념적 편가르기로 나뉜 것이 이 정권들어 생긴 좌파 증후군이다. 남북관계 역시 북의 식언이나 억지에는 한없이 관대히 대하면서 이에 대한 간곡한 충고엔 매정하게 대한다.

보수의 오류를 시정케 해주는 동반자로서의 진보는 나라의 정체성 틀안에 있는 비이념적 정책주의를 의미한다. 진보주의 또한 진보의 오류를 일깨우는 보수의 충고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양자의 공존이 가능하고 이를 희구하는 것이 중도보수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여망에도 불구하고 중도보수든 극우보수든 보수는 무조건 상대못할 수구세력의 반통일분자로 매도하는 이 정권의 병적 편향성은 과연 비이념적 파트너인 가를 생각케 할 때가 많다. 민중은 수구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가구당 평균 가계부채가 3천만원을 돌파한 민생고에서 무슨 기득권이 있어 수구할 것인가, 과거 보수 지도층 일부의 수구세력을 지탄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긴 하여도, 지금의 진보 지도층 일부의 신기득권자들 역시 이미 수구화한 오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 등을 양극화 관계의 대립적 과제로 보는 경제 시각은 중용이 아니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타개책 방안을 대립각에서 찾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시각이다. 그 어떤 세상을 만들어도 피할 수 없는 변증법적 모순을 좁히는 길은 투쟁이 아니고 조화다. 이 진보정권과 그래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서다.

국가사회를 투쟁형에서 이제는 화합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쌈닭 놀음에 지쳤다. 개혁은 만성화한 피곤증으로 그 좋은 낱말이 이젠 듣기조차 싫을만큼 곪았다. 천도다, 과거사다, 뭐다하여 민중사회를 종횡으로 갈래갈래 갈라놨다. 심지어 아들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사과’라는 미명으로 탄핵까지 강요하는 세태가 됐다. 이래서 얻는 것은 없다. 갈등만이 있을 뿐이다. 국토의 남북 분단으로도 모자라 민족의 이념 분열을 부추긴다.

중용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평범속에서 진실을 찾는다. 이성에 의해 과대와 과소의 욕망을 절제하는 식견이다. 동양 철학 고전의 사서(四書)인 논어·맹자·중용·대학 가운데 나온 말이긴 하나 서양 철학에서도 이를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적 덕론(德論) 중심의 개념이나 도덕적 의지규정을 강조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또한 중용과 상통한다. 전향적 화(和)를 갖는 심기는 만사를 이루고 저항적 화(禍)를 품는 심기는 만사를 해친다.

노무현 대통령의 심기에 화기(和氣)가 넘칠 때 민중의 존경을 받게되는 것은 비로소 순리로 간다고 보는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함께하는 역동적 중도보수의 소임이 실로 막중한 시기다. 한데, 신뢰가 가는 이런 정치세력을 아직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또한 오늘의 문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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