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실에 불쑥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혼자 있어 무료하던 참이었다. “호소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 하시지요” “○○구청 건축과장에게 돈을 준 일이 있습니다” “왜요?” “공장을 증축하는 데 건폐율이 안 맞아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공장 증축은 다 했는지요?” “했습니다” “누가 돈을 주었습니까?” “제가요” “?? 아니 그럼 바로 댁이 공장을 하면서 직접 주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 그런데 뭘 호소한다는 겁니까?” “그 돈을 찾아야겠습니다 … 공무원이 돈을 먹어서 되겠습니까?” “아니? 댁은 지금도 공장을 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 이젠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구나!”하고 짚이는 것은 이젠 아쉬울 게 없으니까 본전을 찾아야 겠다는 것이 이 사람의 심산임을 알았다. “그럼, 별 도움을 못드리겠는데요… 가십시오” 그래놓고 마땅치 않은듯 입맛을 다시며 기자실 문을 나서는 그를 다시 불렀다. “댁의 목적이 뭡니까?” “돈만 찾으면 됩니다”
나는 면식도 없는 구청 건축과장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치사한 돈을 빨리 돌려주는 게 당신 신상에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선기자 시절에 겪은 아주 오래된 체험담을 장황하게 끄집어낸 데는 이유가 있다. 모든 뇌물이 다 부도덕하고 불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경중이 있다면 두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가 있다. 공무원이 상대의 심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법으로 뇌물을 받는 것과 상대가 자발적으로 뇌물을 주어 편법을 봐준 것은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 그간 보아온 경험이다. 전자는 비인간적이지만 후자는 그래도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 뇌물수수도 기자실을 찾은 그 사람처럼 비인간적으로 뒤탈을 내는 게 비단 인간같지 않은 그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뇌물수수 사실을 굳이 고하진 않는다 해도 장부에 기입되면 결국 그게 화근이 되기 십상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돈 임자가 여러 사람인 돈의 뇌물이다. 이젠 명절에 기자실을 찾는 일도 없는 것으로 알지만 명절 촌지가 관행이었을 적에도 ○○업연합회나 XX조합 같은 데서 주는 명절 촌지는 거절하곤 했다. 쥐꼬리만큼 주어놓고 엄청나게 부풀려 장부정리할 것이 뻔해 그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커피 한잔도 뇌물로 치는 나라가 있는 것에 비하면 3만원 이하의 향응은 뇌물로 안 보는 우리의 공무원윤리강령은 꽤 관대한 건지 모르겠다. 어떻든 예전 같으면 공식부패랄 수는 없어도 준공식부패였던 금전수수가 지하부패와 마찬가지로 엄단되는 현상은 사회발전이긴 하다.
그러나 부패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지금 과연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보편적 사회 인식인 것은 이 또한 이 시대 우리의 불행이다. 한동안 부조리 척결 바람이 한창이었을 적에 들키면 부조리고 안 들키면 ‘복조리’라는 비양된 유행어가 있었다.
정치적 부패 경험자인 대통령이 ‘부패추방’을 말할 때 얼마나 승복감이 갈 것인가는 참으로 심각하다. 정치적 부패든 관료적 부패든 사회적 부패든 부패는 다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패추방은 부패추방에 위화감이 없을 때 비로소 부패추방이 성공된다. 강을 건넌 돼지들이 수를 세면서 수를 세는 자신은 빼고 세는 바람에 수가 틀렸다는 어느 우화처럼 자신의 부패는 제쳐두고 외치는 부패추방은 결국 그같은 수의 셈처럼 틀리게 마련이다.
땅에, 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는 그 사람들이 잘못이 없다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말없는 저항 또한 이유가 없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시대의 모순과 혼돈이 빨리 정리돼야 정말로 부패가 없는 청정의 국가사회가 이룩된다. 이런 터에 대통령 오른팔이라는 안 누군가의 비리를 선처해 달라는 여당 의원들의 집단요구는 기자실을 찾은 그 얌체없는 사람같은 부류와 별로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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