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저 포도는 시다'

(5월29일) 열린우리당 당선자 청와대 만찬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눈물을 흘렸다”(정봉주의원 사이드)거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청와대 발표)거나 하는 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의별 보수를 갖다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보수는 힘센 사람이 좀 맘대로 하자는 것… 약육강식에 가깝고, 진보는 고쳐가며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라고 했다(연세대 특강)는 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폐가 심하기 때문이다. 논리의 비약, 단안의 독선이 전제된 결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바뀌지 않는 보수는 있을 수 없으며 보수도 진보와 마찬가지로 더불어 살자는 것이 시장주의 원칙이다. 보수 또한 어차피 (공동체)사회를 이뤄 살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잡탕인 것은 현실 정치의 편의를 위해 그런다손 치더라도 신권위주의 정치문화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개혁적이랄까, 반개혁적이기 때문이다. 실세를 등에 업은 평당원(문희상 의원)이 김혁규 총리카드를 내세워 당 지도부의 인책을 경고하는 시스템 일탈은 그것으로 이미 민주정당 면모의 맛이 갔다. 화제의 만찬장은 나는 튀어도 되고 너희는 튀면 안 된다는 억압된 추종의 주문속에 ‘용비어천가’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원칙이란 원칙을 말하는 자신에게도 불리한 게 있게 마련인 것이 그간 경험해온 원칙의 개념이다. 어떻게 그가 말하는 원칙엔 그 자신이 손해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상대의 손해만 강요하는 논리가 성립된다고 보는지 정말 괴이하다. (대통령의) ‘민주대연합론’에 이어 (문 의원이) ‘민주당 합당설’을 들고 나온 것은 술수의 상황론이지 원칙론이 될 수 없다.

대화와 타협을 말하면서 상대를 이해하기 보다는 나의 생각을 강요하고, 정직한 정치를 말하면서 표퓰리즘을 조장하는 지하형 독선은 다중인격을 발견하는 것 같아 우리를 또 슬프게 한다. 개혁은 혁명이 아니다. 이러므로 개혁세력의 주체 역시 개혁의 객체가 되어야 비로소 공감대가 형성되고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개혁이 개혁답지 않은 사실을 심히 슬프게 여긴다. 지역주의 타파를 말하면서 지역주의 편승을 되새김해서는 이 또한 백날가야 말 잔치에 그친다.

천도(행정수도 이전)와 함께 200개에 이르는 수도권 공공기관을 오는 2009년부터 지방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 진보정책이라면 그 근거의 타당성을 좀더 명백히 제시해야 한다. 수도권을 제외한 13개 시·도에 공공기관을 어거지로 옮기는 물리력보다, 그 돈으로 차라리 지역특화산업을 육성하는 화학적 지원작용이 더 지방균형발전이라고 믿는 것이다. 행정수도로 포장한 천도는 명백히 (헌법상 국민투표에 의해) 국민적 합의가 요하는 역사적 사업이다. 되면되고 안되면 안되도 그만인 그 숱한 대선 공약이 능사가 아니다. 특정지역의 기대 심리를 부풀려 대선에 이어 총선에 재미를 본 행정수도의 정치적 산물이 헌법정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

무엇을 고쳐가며 사는 것도 개선이 있고 개악이 있다. 어림잡아 100조원이 소요되는 행정수도 이전 및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긁어 부스럼 내는 개악이 아닌 증거를 보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보지 못하는 사실을 무척 슬프게 생각한다. 400만명의 신용불량자, 300만명의 잠재적 신용불량자, 50만명의 청년실업자들은 그래도 경제가 걱정없다고 장담하는 그들의 낙관론에 신용이 가지 않는 것이 슬프다.

잘 익은 포도넝쿨 밑을 지나가던 여우가 뛰어올라 따려고 했으나 안되자 “저 포도는 시다”고 했다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가 되어서는 안된다. 민중은 고달프지만 ‘잘 한다’는 말을 하고싶어 한다. ‘잘 못한다’고 해서는 내일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뭔지 모르게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많다. 오늘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을 민중은 더 크게 슬퍼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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