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박지원의 '통곡'

정치권력은 쟁취의 전리품인가, 아니다. 권력 장악은 쟁취의 모진 과정을 거치긴 한다. 하지만 처분이 자유로운 전리품일 수는 없다. 정치권력의 장악은 책임을 수반한다. 영원한 정치권력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없다. 거머쥔 권력을 놓았을 때가 거머쥘 때 못지않게 중요하다.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홀가분한 마음은 책임의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운 마음은 남용의 발목으로부터 붙잡히는 공포다. 이를 모르지 않으면서 남용의 유혹을 좀처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권좌를 생전 누릴 것 같은 착각속에 빠지는 것이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를 가리켜 세인은 ‘부통령’이라고 했고 ‘소통령’이라고도 했다. 새천년민주당 정권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누구보다 가까운 지근에서 항상 실세의 중심에 섰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직명과는 거리가 먼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비밀 특사로 평양에 다녀온 것은 DJ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 가를 말해 준다. 그리고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그가 곁에 보이지 않으면 DJ가 불안해 했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게 아니다. 그의 충성심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래서 대북송금에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사법처리에도 후회없는 역사관과 함께 여전히 불변의 충성심을 보였다. 그러한 그가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특가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항소심이 계류중인 법정에서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생명보다도(소중한) 하나 남은 제 오른쪽 눈을 (제발) 지키게 해주십시오….” 재판장에게 이렇게 20여분간 호소했다고 (신문)보도는 전했다. 녹내장으로 30년 전 실명하여 의안을 한 왼쪽 눈에 이어 근래 오른쪽 눈마저 녹내장이 악화됐다며 장기 입원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를 읍소했다.

영어의 몸으로 과거의 여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인에 불과하다. 밥 못 먹는 것을 딱하게 여긴 어느 모범수가 사준 빵을 보고 울었다는 나약한 여느 인간에 불과하다. 이제 ‘부통령’도 ‘소통령’도 아닌 병자에 불과한 지난 영화가 그리 먼 세월인 것은 아니다. 겨우 1년 남짓 된다. DJ조차 그의 절규를 들어주는 데 아무 힘이 되지 못하고 방관만 하는 처지가 됐다. 권력이란 원래가 이런 것이다.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흠이 없어도 권좌에서 물러나면 줄 떨어진 두레박이다. 하물며 흠이 있으면 추궁을 받음에 있어 더욱 가혹한 건 마땅하다.

권좌와 수인의 나락은 하늘과 땅 사이지만 그 길은 결코 먼 게 아니다. 멀지 않는데도 자기만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자만을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권력의 잘못된 맛이다.

노무현 정권의 뒤끝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하긴, 이미 드러난 것도 있다. 이른바 측근비리는 무척 슬프게 한다. 그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당당해 보이는 모습은 정말 뻔뻔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슬프다. 권력을 정권 쟁취의 전리품으로 여겨 그러는 것 같다. 구태의 이런 해묵은 생각으로는 감히 개혁을 말할 수가 없다. 박지원의 법정 눈물이 호가호위의 소치라면 이 정권에서의 호가호위 역시 피눈물을 쏟게 된다.

그의 실명 위기가 사실인 지 엄살인 지는 외부에선 확인이 어렵다. 법은 그의 죄값에 상응하다면 그 어떤 중형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빛을 잃게할 권리는 어느 법에도 없다. 재판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감정이 복받친 듯 대성통곡했다고 (신문) 보도는 전했다.

이 정권에서도 뒷날 대성통곡하는 불행한 권력이 없기 위해서는 그 통곡의 의미를 자신의 일처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당부하는 이유가 있다. 불행한 정권을 두는 것은 곧 민중의 불행이기 때문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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