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복사골문학회 거듭나기

“3·1운동은 목숨을 내걸고 잃어버린 내 나라를 찾고자 하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지이자 행동이었지. 모든 것을 초월해 온 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3·1운동 정신이 퇴색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야.”

3·1운동 당시 지역 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 김영옥옹(89).

8세의 나이에 3.1운동을 체험한 김옹은 81년전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때의 뜨거웠던 함성과 피끓던 독립의지를 떠올리다가도 부패한 현 정치권과 국민들의 흐릿한 기치관을 거론해 가며 3·1 정신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한달뒤에 수촌리에도 만세물결이 밀려왔어. 온 주민들이 밤새 만든 태극기와 ‘수촌리’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앞장서서 거리로 뛰어나갔지”

수촌리의 열정적인 독립운동은 교회의 영향이 컸다. 1905년에 김옹의 작은 아버지인 고 김응태씨가 설립한 수촌교회는 당시 수촌리 주민들의 개화사상을 일찍부터 고취시켰고, 인근지역보다 앞장서서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과 만행도 그만큼 잔인하게 자행됐다.

“하루는 어머니 옆에서 형하고 자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불을 지르고 발로 차면서 막 나가라고 하는거야. 밖으로 나가보니 왜놈들이 집집마다 불을 지르는데 불바다로 온 마을이 뒤덮여 대낮처럼 환했어. 끔찍했지.”

상투를 튼 사람은 상투를 자르고 청년들은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 독립운동 주동자를 대라며 마구 짓밟았다고 김옹은 회상했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해서 진리마저 달라지면 안되는 법이야. 3.1운동처럼 나라가 어려울 땐 각지에서 나라를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나라가 살 수 있는데 지금처럼 자기만 살겠다는 하는 것은 나라와 자신 모두를 망치는 길이야”

나라를 위한 ‘공동체의식’을 유난히 강조하는 김옹은 요즘의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국민들과 맥을 같이 한다면서 이기적이고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신현상기자 hsshi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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