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
1492년 실수투성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중국 동부 해안의 황금 도시 그랜드 칸을 찾으려다 또다시 예상 목적지에서 8천마일 이상이나 한참 벗어나 있는 카리브해에 잘못 상륙한다. 콜럼버스의 이런 실수는 곧 우리에게 왜곡된 신화를 주입하기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두 집단이 서로 살벌하게 싸운다는 이야기는 가장 치명적이다. 그것이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아라와크족과 전투적인 카리브족의 대립. 그 편견의 직격탄을 맞은 부족은 카리브족이다. 유독 그들은 잔인하고 호전적인 부족으로 인식됐다. 콜럼버스가 카리브족 사람들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전쟁광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라는 이름이 카리브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유도 그런 오해가 한몫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의 상처는 전쟁이 아니라 이웃 섬 주민들과의 교역에서 얻은 흔적이었다. 당시 부족 간 거래는 제안이 거절되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는데 그것을 전투로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이 오해는 유럽 왕실이 부족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면서 더욱 왜곡됐다. 노예화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원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야만적인 존재여야 했다. 결국 카리브족은 아이들을 살찌워 잡아먹는 집단이 돼 버렸다.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이 카리브족에게 부여한 이런 고정관념은 식인종을 뜻하는 카니발(Cannibal)이라는 단어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니발 역시 카리브(Carib)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9년 잉카의 역사를 기록한 저자이자 페루와 스페인 혼혈 작가인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의 엄마까지 잡아먹는 잉카 부족의 식인풍습과 적을 많이 잡아먹을수록 천국에 갈 자격이 생긴다고 믿는 어느 잉카 부족의 믿음에 관해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가르실라소의 태도는 카리브족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메스티소라는 인종 혼혈의 정체성 탓인지 그는 부족민들을 원시 형태의 종교인으로 묘사하고자 했고 반대로 스페인인이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폭로했다. 그때부터 식인풍습은 더 이상 노예제도를 위해 희생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정신이나 문명사회에 자리 잡은 은폐된 야만성의 상징으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1690년 인간지성론에서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카리브족의 식인풍습을 그런 차원에서 인용한다. 여기서 카리브족의 식인풍습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천적 진리, 이를테면 왕권과 부권의 은폐된 자연적 정당성을 반박하는 예시로 쓰인다. 1896년 지크문트 프로이트 역시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그 육체를 나눠 먹은 아들의 상황을 정신분석 이론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렇게 식인풍습은 로크의 정치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주석으로 기능한다.
1729년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는 겸손한 제안이라는 에세이에서 매우 극단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여기서 스위프트는 ‘아이를 잡아먹자’는 식인풍습을 직설적으로 강조한다. 식인풍습을 통해 당시 국가의 착취, 빈곤에 대한 무관심 등을 일갈하기 위해서다. 1492년 콜럼버스 이후 시작된 식인에 대한 오해는 가르실라소의 인식 전환을 거쳐 결국 로크와 스위프트에 이르러 국가가 은폐해 온 야만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국가라는 합리성이 은밀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잡아먹게 한다는 식의 스위프트 풍자는 그래서 여전히 기시감처럼 반복돼 보인다. 그래서일까. 20세기를 코앞에 둔 1896년 식인풍습을 담아 정립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역시 식인이라는 야만이 사실은 우리 문명의 본성이어서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중이라고 집요하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댓글(0)
댓글운영규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