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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2 (수) 메뉴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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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두 자리

두 자리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논어 「옹야편(翁也篇)」에 나오는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구절이다. 자구(字句)대로 풀어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기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즐긴다는 뜻일 텐데, 항시 어떤 연유로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지 우문(愚問)이 뒤따른다. 물은 장애를 피해 흘러가기에 지혜롭고, 산은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인자하다는 게 일반적 이해로 알려졌으나 그 또한 개운하지는 않다. 천양희 시인의 시 「두 자리」는 개운치 않은 이해가 남긴 이물감을 씻겨 내려가게 해준다. 시의 1행과 2행을 읽으며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은 산처럼 굳건해야 하고,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은 물처럼 유연해야 한다는 게 어짊과 지혜의 본뜻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게 되니 생각이 한결 명료해진다. 그러나 정작 나를 놀란 게 한 것은 따로 있으니, 그것은 ‘들을 보는 마음’이라는 표현이다. 어짊과 지혜도 좋으나 그것들은 ‘들을 보는 마음’만 못하다는 시인의 인식은 삶의 깊이가 여간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어 보인다.

시 「두 자리」를 읽다 보니 문득 김제의 만경평야를 봤을 때의 감흥이 떠오른다. 그냥 속절없이 벅찼었다. 속지 않으려 애쓰고, 비우고자 다짐하며 흘러왔던 그 모든 시간의 우여곡절이 한순간에 잦아들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꿈틀댔었는데, 천양희 시인은 그것을 “살아있는 서명 같고/말의 축포 같은/참 그것은/너무 많은 마음이니”라는 구절로 드러낸다. 확연하고 감동적이다. 아픔과 기쁨, 옳고 그름, 사랑과 이별이라는 감정들의 교차로 이어진,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지나와 탁 트인 들 앞에 선 시인은 그 시절을 견디며 붉게 피어 있는 꽃들로부터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라는 한 생각을 얻어낸다. 혼자 견딘 게 아니라 서로가 견딘 그 자리는 살아있음의 자리다. 그 자리는 참으로 “너무 많은 마음”이어서 고독해 보인다. 산도 물도 아닌 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좋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려면 얼마만큼 고독해야 할까. 아직은 알 수 없기에 나는 내 자리만큼만 겨우 견뎌보기로 한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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