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지시로 진상조사위원회 조사가 있었지만, 이른바 ‘판사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지도 못하는 등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탓이다. 판사 대표들은 이 사건의 책임 소재 규명을 넘어 인사권 등 사법행정권 남용 재발방지 대책, 전국법관회의 상설화 등을 주요 안건으로 채택했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1971년 8월부터 2009년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 있었다. 검찰 공안부의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5공 사법부 수장의 재임명, 법관 신분보장 등 사법부 개혁의 미흡함, 남성 중심 대법관 구성과 기수 중심 인사 관행, ‘촛불 재판’ 관여 등이 그 계기였다. 집단행동의 결과 검찰의 수사 중단, 대법원장 사퇴, 여성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임명, 법원장의 사건배당 재량권 제한 등의 성과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가 낳은 폐해의 존속과 반복은 그동안의 사법개혁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다. 실패원인 중 하나는 사법부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못한 탓이다. 사법부의 존재이유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법부는 인권과 분권의 사법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그 본연의 헌법적 구실을 할 수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제103조)해야 한다. 법관의 독립성은 사법체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람이 그 절실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법원 내부의 저항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진압되고 배제되고 불이익을 받았다. 반대로 동조와 침묵의 순응주의는 그 대가를 받았을 터이다.
법관의 정치적 자유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누구나 정치적이다. 문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판결을 행하는지 여부다. 그 판단은 공론의 장에서 심판받으면 된다. 법관의 독립성이 법관의 절대 독재는 아니다. 권력의 투명성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기본 덕목 중 하나 아닌가.
한편 법관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권력의 시도에 대해서는 집단적으로 불복종할 뿐 아니라 제도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 권력자는 엄중하게 책임을 지우고 처벌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법관은 약자의 인권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체득하면서 권력의 탐욕에서 벗어나 단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법관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거듭난다면, 국민은 법관을 믿고 사법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이다. 제왕적 대법원장 대신에 법관 대표로 구성하는 법관조직체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지할 것이다. 시민과 재판권을 분유하는 배심제와 아울러 사법행정권을 시민과 공유하는 사법체제를 옹호할 것이다. 변호사 자격 없는 이에게도 대법관의 문호를 개방하는 대법원을 국민의 대법원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법원 판결의 결과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면 사법개혁은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재판에서 무시당하고 구제받지 못한 인권피해자들의 판례를 일일이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법원은 민주공화국의 사법부로 아직 복귀하지 않은 것이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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